인류역사상 가장 발전한 과학물질문명을 향유하고 자본주의가 발달했지만 지역, 계층. 세대, 인종, 국가 간 갈등은 완화는 커녕 더욱 확대되고 있다. 인간의 끝 모를 욕심으로 세상은 예토(穢土)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이다.
한국 사회는 물론 지구촌 전체가 갈등과 대립의 몸살을 앓으며 인간성 상실의 가속도를 높이고 있다. 1400년 전 ‘화쟁(和諍)’을 통해 화해와 상생을 제시한 원효대사의 가르침이 그리운 시절이다.
원효대사와 인연이 깊은 평택 수도사(주지 적문스님, 평택불교사암연합회장)는 ‘평택원효대사깨달음체험관(관장 적문스님)’을 개관해 “다툼을 화합해 하나로 통하게 한다”는 화쟁사상을 펼치고 있다.
평택 수도사는 원효대사(617~686)가 깨달음을 성취한 오도성지(悟道城地)이다. 의상대사(625~701)와 함께 당나라 유학을 하려고 중국과 가까운 서해안에 도착했던 곳으로 지금의 수도사 인근이다.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면 ‘서라벌-상주-보은-청주-목천-천안-평택’으로 이어진 길을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이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서라벌에서 출발해 한반도 남중부를 관통하며 고된 길을 걸어온 두 스님은 오래된 무덤에서 잠을 청했다. 피로에 지쳐 밤 중에 비몽사몽 간에 맛있게 마신 물이, 다음날 해골 물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원효대사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이치를 깨달았다.
원효스님의 오도송에 잘 드러나 있다.
‘심생즉종종법생(心生卽種種法生), 심멸즉종종법멸(心滅卽種種法滅) 삼계유심만법유식(三界唯心萬法唯識) 심외무법호용별구(心外無法胡用別求)’
“마음이 생기면 가지가지의 법이 생기고 / 마음이 멸하면 가지가지의 법이 멸한다. / 삼계가 오직 마음이요, 모든 현상이 앎에 기초한다 / 마음 밖에 아무 것도 없는데 무엇을 따로 구하랴”
이때가 신라 무열왕 8년(661)으로 원효스님은 44세, 의상스님은 36세였다. 고구려, 신라, 백제로 나뉘고, 여기에 당나라까지 끼어들어 삼국전쟁이 치열하게 이어지던 무렵이다. 문무왕 16년(676) 11월 신라군은 금강 하구 기벌포에서 당나라 수군을 섬멸하며 통일의 대업을 완수했다.
적문스님 주지 부임후 노력
난관을 극복하며 원효 선양
무애사상으로 ‘자유인’ 지향
하지만 외세를 끌어들인 전쟁이 남긴 상처는 컸다. 수많은 군인과 백성이 목숨을 잃고 다치거나 포로가 됐다. 그 가족들은 피눈물을 흘렸다. 평화적 방법인 아닌 무력을 사용한 전쟁의 상흔(傷痕)은 쉽게 지울 수 없었다.
수도사 주지 적문스님은 “원효대사께서 살아계실 당시 시대적 상황은 엄청난 격동기로 백성들의 목숨은 경각에 달렸고, 마음까지 크게 다쳐, 갈등이 극에 달했을 것”이라며 “그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원효대사는 ‘치유와 화합’의 가르침으로 화쟁사상을 펼쳐 사회를 통합하고 백성을 위로했다”고 강조했다. 동업중생(同業衆生)으로 상대를 이해하여 독선과 아집에 빠지지 않는 동시에 각자의 개성, 즉 다양성을 인정하며 수용하도록 했던 것이다.
화쟁과 더불어 원효스님이 전한 가르침은 ‘그 무엇에도 걸리지 않는 자유인이 되라’는 ‘무애사상(無碍思想)’이다. 수도사 주지 적문스님은 “참된 삶의 길을 깨닫고, 함께 나누는 것이 진정한 삶”이라며 “형식이나 규범에 크게 얽매이지 않고 자유인의 삶을 살 것을 전하셨다”고 밝혔다. 화쟁이 규범이라면, 무애사상의 목표였다고 할 수 있다.
2017년 4월 원효대사깨달음체험관을 개관한 이후 적문스님은 원효대사의 이러한 가르침을 평택을 중심으로 전국에 알리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효율적으로 전하기 위해 다양한 방편(方便)을 도입했다. 원효학당을 개설하고 학술대회를 연 것은 물론 원효템플스테이, 어린이 원효학당, 무애무 학습프로그램 등 시도했다. 수도사 경내에는 ‘원효성사 팔상도(석조)’를 조성했다.
원효템플스테이(템플라이프)는 원효대사의 가르침을 배우는 동시에 사찰음식명장(名匠)인 적문스님의 지도로 사찰음식을 체험하는 특별한 시간도 갖는다. 1993년부터 한국전통사찰음식문화연구소장으로 3000명이 넘는 수료생을 배출한 적문스님은 2019년 10월 사찰음식 명장 3호로 위촉됐다. 비구 스님 가운데 첫 사찰음식명장이다.
시민과 불자들의 반향이 컸다. 다양한 프로그램의 채워가며 지속하는 데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시대의 흐름에 부합하면서 시민과 불자들이 참여하는 방안을 심도 있게 모색하고 있다. 적문스님의 특유의 결단력과 추진력에 원력(願力)이 더해지고 있기에 발전이 기대되고 있다.
2003년 8월 수도사 주지로 부임해 사격(寺格)을 일신하고 원효대사 선양에 매진하고 있는 적문스님은 “지금은 문화시대로, 흥미와 더불어 유익함을 주지 않으면 불자와 시민들의 참여를 이끌어내기 어렵다”면서 “다양한 문화콘텐츠를 활용하고 눈높이에 맞는 프로그램을 개발해 역사적 가치를 확인하고 불교의 가르침에 한층 가까워지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시대를 초월한 인류의 스승인 원효대사를 역사와 교과서에만 머물게 하지 않고 미래세대와 시민, 불자들이 자긍심을 갖도록 하는 방안을 강구 중이다.
적문스님은 주민들과도 끈끈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다. 평택 시민단체들과 연대해 지역 사회에 기여하는 체험관이 되도록 실천하고 있으며, ‘원효대사 오도성지 순례’를 마련해 불자는 물론 주민의 참여로 ‘공동체의식’을 함양하고 있다.
원효대사와 관련 있는 경주 분황사, 양양 낙산사 등 사찰이나 성지를 방문하는 프로그램으로, 순례 과정에서 불교문화콘텐츠를 활용해 지역에 이바지한 성공사례를 배우기도 한다.
이와 더불어 정월대보름행사, 한마당 큰잔치, 사찰음식 교육, 산사음악회 등을 여는 것도 지역과 함께 하기 위한 노력이다. 적문스님은 “사찰과 주민들이 같은 시간과 공간에 존재하고 있으며, 종교 역시 초월해야 한다”면서 “서로 조화롭게 화합하며 공동체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원효대사의 화쟁사상을 현대적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삼국통일 이후 130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한반도와 지구촌의 갈등과 대립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아있다. 오히려 더 큰 갈등과 대립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적문스님은 “세상은 연기(緣起)에 이뤄지는 것이며, 무상(無常)한 것이기에 낙담해선 안된다”면서 “그럴수록 원효스님의 화쟁사상으로 우리 시대가 겪고 있는 갈등을 풀고, 무애사상을 깨달아 우리 모두 자유인이 되기를 바란다”고 발원했다.